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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조커

ㅱㅸㆄㅹ 2023. 8. 13. 00:01

1. 법

인간은 약하기에 악한 것일까, 악하기에 약한 것일까? 말장난 같은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문장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생각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집에 도착하는 쪽이 더 빨랐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으니 귀가 다 따가울 정도의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잠을 자기에 내 정신은 너무나 말짱했고 결국 나는 이끌리듯이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다.

어쩌면 법과 도덕, 윤리 따위는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번의 교육을 통해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배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수단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법을 완벽하게 세워놓는다고 해도, 내가 작정하고 범죄를 저지르려 할 때 법이 날 막아줄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인 윤리는 물리적인 현실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이 말인즉슨, 내가 총을 누군가에게 겨눌 때 <윤리>라는 방패가 나타나 대신 맞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리가 "어이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라며 내 총을 뺏어가진 못할 것 아닌가? 윤리와 도덕은 사람들이 바르게 행동하도록 장려할 뿐이다. 그 교육에 물리적 강제성은 없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흔하지 않다...ㅎ
사람은 자신이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법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생각보다 질서는 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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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까지 범죄에 휘말린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화가 지속할 것임을 굳이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
TV에서 범죄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나도 저런 피해자가 될 수 있어.' 라는 불안감과 '설마 내게 저런 일이 일어나겠어?' 라는 회피 심리를 동시에 느낀다. 이는 인간의 슬픈 본성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누가 하루종일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살고 싶겠는가? 불안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허울뿐인 질서에 매달리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 주변에는 (대부분) 정상적인 사람들만 있기에, 칼부림 찐따 같은 싸이코패스는 드물며, 이 세상 어딘가에 싸이코패스가 있다 해도 우리 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딱 하나 ㅡ 법의 보호를 받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은 법을 어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일 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일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의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범죄까지도.



2. 조커

조커, 그도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낡아빠진 아파트에 살며 광대 분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늙은 어머니를 보살피고, 코미디언이란 꿈을 위해 노력한다. 이게 그의 불행한 인생 전부였다. 그의 삶은 삐걱대긴 해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삶은 우발적인 살인으로 인해 그 궤도를 이탈해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하철에서 첫 살인을 저지르고 조커는 허겁지겁 화장실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춤을 춘다. 지하철에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듯 깜빡이고 있던 조명이, 화장실에선 그런 일 없었단 양 광명을 찾은 듯이 빛나고 있다. 그가 춤을 추는 장면은 전체적으로 로우 앵글로 진행된다. 마치 새로운 신의 탄생을 우러러 보듯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춤을 고른 무용수들처럼 그는 춤을 춘다. 그의 춤에서 살인의 기쁨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것 같다고 느낀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영화 조커 (2019)


그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의 살인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다. 죽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사회의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부자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고담에서 이러한 사건은 방아쇠가 되어 여러 시위를 촉발했다. 조커의 광대 분장은 시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 사람들은 조커의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가 구호를 외친다. 그들은 말한다. 부자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그리고 조커는 꿈에 그리던 TV 토크쇼에 출연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던 사회자를 쏴 죽인다. 그는 "내가 죽었다면 너희들은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겠지!" 라며 부유층의 위선을 비판한다. 이 장면은 여과 없이 생중계되고 시위는 더욱더 격화한다. 거리로 나온 조커는 시위대에 의해 영웅으로 떠받들어진다. 영화 초반에는 우울한 파란색으로 물들어있던 거리가 이제는 불길과 피의 붉은색으로 가득하다.
시작부터 어긋나 있던 그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 와서야 타인의 지지를 받는다. 이윽고 영화가 끝나고 <The end> 라는 글자가 별볼일 없는 필기체로 쓰인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문득 떠올랐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커라는 캐릭터의 허무주의가 어떻게 광기로 변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 끝없는 허무에 관객을 사로잡아 놓는 힘은 아름다운 미장센과 배우의 열연에서 나온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범죄는 정말 막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이 자유의지로 얻는 가치가 범죄로 인한 해악보다 클까? 이 영화가 내게 이런 깊은 회의까지 들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오늘 밤에도 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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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범죄발생을 억제할 수 있는 이유는 처벌로 인한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진대, 그것이 아무리 소수일지언정 개인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고 여기는 경험을 제공하는 사회는 실패한 거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조커는 죽음이 삶보다 더 값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이었으니